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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살의 감독이 영화사에 남긴 지적이고, 아름답고 그래서 매혹적인 자신의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을 상영관에서 볼수있다는 동시대인의 기쁨.

2005년이었던가, 스물두살에 나홀로 뉴욕에 놀러가 라이온킹을 앞에 두고 같은 종류의 감동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났다. 천재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감동. 어쩌면 그때 그 감동이 내내 마음에 남아 끊임없이 공연장을, 대중음악이든 클래식이든 뮤지컬이든 연극이든 찾기 시작한지도 모른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기억으로 존재하는 과거는 말할것도 없고, 지금 현실 조차 한가지 차원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의 다양한 층위를 그려내며, 동시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여러가지 현실 사이의 경게를 계속해서 넘나든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연극 에우리디스의 극작가 앙투완이 죽고, 유언으로 자신의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을 집응로 불러들이는데서 이 극이 시작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스를 구하러 지하 세계로 나아가듯, 앙투완의 부고를 전해들은 배우들은 그가 초대한 집으로 모여든다. 그들에게 부음을 전하고 그들을 대접하는 역할을 맡은 집사를 포함하여 집 안의 환경 역시 현실적이지 않다.

앙투완이 이들을 집에 모이게 한 목적은 두가지. 1. 이들은 정말 나를 사랑하는가? 2. 나의 연극은 지금 시대에 다시 재현될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가? 이 두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앙투완은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연극을 다시 만들어 낸다.

앙투완이 보여주는 콜롬보 극단의 연극은 극중 극의 형식으로 보여진다. 이 연극을 녹화한 영상을 보며 배우들은 각기 나름의 연기를 시작한다. 이들의 연기가 극중 극 이외의 현실을 다시금 창조해낸다. 그들은 다시 앙투완이 만들어내낸 연극적 현실로 돌아와 프레임안에 보여지는 콜롬보 극단의 연극을 보기도 했다가, 자신들의 연극을 다시 연기하기도 하며 여러 층위의 현실을 자유롭게오간다.

4막이 끝나고, 앙투완은 살아 있고, 배우들은 기뻐하나 이 모든 연극이 끝나고 앙투완은 자살을 한다.

확인하고 싶었던 두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 대해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었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오르페우스 였기 때문에, 에우리디스와 다시 만나기 위해 다시 죽을 수 밖에 없던 걸까.

영화가 남기는 이런 의문은 그러나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아흔살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의 깊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일듯 말듯 제시하는 영화의 지적 사유의 깊이. 그리고 영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무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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