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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이 생말로에서 시작한다. 2월 어느 흐리고 추운날 생말로에 다녀왔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샤또브리앙의 무덤이 있다는 섬에는 가지 않았지만, 샤또브리앙이 태어난 저택을 개조해 만든 호텔에서 숙박했다.  생각해 보니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어, 나 저기 알아!’ 하거나, ‘어, 저기 한번 방학때 가볼까?’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프랑스에 살면서 좋은 점으로 굳이 꼽자면 꼽을 수 있겠다. 하루하루 별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꾸준히 좋은 점을 발굴하며 살아야 일상을 유지할 정신상태가 유지된다. 그런점에서 요즘 꾸준히 사먹고 있는 레몬 프로스팅이 올려진 이 쿠키 한국에서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말로에 있던 가족은 철학교사인 나탈리와, 또 철학 교사인 남편,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인데 몇년 후 남편은 바람이 나고, 나탈리의 히스테릭한 엄마는 죽는다. 영화의 주된 관계는 나탈리와 가족, 나탈리와 파비앙인데, 나탈리-가족의 관계를 통해서는 나이가 든 여성이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해체된 가족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가는지 보여준다.(요즘 논문을 쓰다 보니 내가 이런 단정적인 문장을 써도 되는 건가? 하며 주저하게 된다. 정신차리자..) 남편의 바람, 엄마의 죽음이라는 드라마적인 사건은 드라마틱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남편이 외도 사실을 고백하는 자리에서는 ‘왜 나에게 이런 고백을? 그냥 혼자 알아서 하면 안돼?’ 라고 반응하고, 엄마의 죽음에는 침착하게 성당을 찾아가 장례를 논한다. 한명의 가족을 잃었지만, 집을 떠난 아이들이 다시 아이들을 낳고,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나탈리의 집에 찾아오며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탈리와 파비앙의 관계는 나탈리와 사회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은퇴에 가까운 나이의 여성에게 사회는 역할을 기대하지도, 주지도 않는 나라에서 평생을 보낸 나에게 흥미롭게 보이는 부분이었다. 나탈리는 제자 파비앙이 살고 있는 대안 공동체에 방문하고, 거기 있는 젊은이들과 대화하며 계속 젊은 세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회의적인 시선을 보이거나, 급진적인 의견에 대해 반감을 표현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등을 돌려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알프스 시골 마을에서 대안 공동체를 꾸리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이상적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땅이 넓어서 그런 시골 집은 정말 저렴하게 구할 수 있을 거고, 땅 넓고 기후 좋은 곳에서 간단한 작물은 길러서 먹을 수도 있고, 지식인들이 적당히 자기 글을 팔거나 강의를 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만큼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 보이기도 한다. 당장 우핑(WWFOOING) 사이트에만 들어가봐도 비오 (Bio)로 시작하는 가치들을 주르륵 나열하며 숙식 제공해 줄 테니 우리 농장에 일하러 오지 않으련..? 하는 곳들이 꽤나 많고, 그런 곳들을 찾아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나탈리와 고양이 판도라와의 관계이다. 엄마가 키우던 늙고 뚱뚱한데다 까만색이기까지 해서 누구도 데려가지 않을 고양이를 엄마의 죽음으로 판도라가 맡게 된다.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 나탈리는 처음부터 고양이를 못마땅해하지만, 이내 버스에서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돌아와 테이블 위에 있는 판도라를 쓰다듬고, 파비앙의 농장에 놀러갈 때 판도라를 데리고 간다. 농장에서 집을 나간 판도라를 찾기 위해 사료통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가 하면, 다음날 아침에 쥐를 잡아온 판도라를 자랑스러워하며 껴안는다. 가족을 읽어버린 나이든 아무도 원하지 않는 존재끼리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는 장면들을 보며 세상에 어떻게 고양이 같은 완벽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는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 없이 말도 안통하는 나라에서 고양이들에게 의지해서 하루하루 살 고 있는 나도 나탈리와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지 크게 다르지. 나탈리는 프랑스에 사는 프랑스인 백인 엘리트 여성이니까. 아무튼 그래서 할머니가 될 때 까지 같이 살 줄 알았는데, 이미 할머니인 나탈리는 고양이를 파비앙에게 입양 보낸다.  고양이를 다음 세대에게 보내는 것도 다가오는 것들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가오는 것들의 수가 더 적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가오는 것들의 수는 비슷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일까. 과연 나도 나이가 들면 지금 보기에 극단적인 것들도 나탈리 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받아들이며 사는 게 우아한 삶의 태도인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영화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든 게 오랜만이어서 오랜만에 끄적끄적 써보았지만, 이제 나는 한국말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고 프랑스어는 원래 못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슈베르트 가곡을 찾아 듣게 했고, 원피스를 쇼핑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게 한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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